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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 수암종택'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이옥선 | 기사입력 2022/08/22 [10:11]

경북 '상주 수암종택'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이옥선 | 입력 : 2022/08/2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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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주 수암종택 전경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2.08.22.

 문화재청은 19세기 이전 상주지역 상류주택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상주 수암종택'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했다.

'상주 수암종택'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1582~1635)을 불천위로 모시는 종가다. 불천위는 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을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국가에서 허가한 신위를 이른다.

상북도 상주시 중동면에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의 지맥이 모이고, 낙동강과 위천이 합류하는 명당자리에 자리한 이 종택에는 ㅁ자형 본채를 중심으로 별동의 녹사청과 사당이 있다.

구전에 의하면 류성룡의 수제자 상주 출신 우복 정경세(1563~1633)가 집터를 정해줬다고 한다. 실제 우복 종택은 약 32㎞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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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주 수암종택 본채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2.08.22.


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로 연결된 ㅁ자형 건물로, 경북 북부지방의 건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안채 대청 우측 마루방의 지면을 들어 올려 누마루처럼 꾸민 점은 다른 고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조다.

안채 대청 상량묵서에서 건립연대(1858년)가 명확하게 남아 있는 등 비교적 원형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녹사청은 본채 전면에 있는 ㄱ자형 건물로,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류후조(1798~1876)가 1872년 봉조하를 제수받은 후 녹봉을 지고 오는 관리들을 맞이하거나 묵게 하는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건물이 민가에 남아 있는 것이 희소한 사례로 평가된다.

청백리 집안답게 별 장식 없이 소박하지만 당시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야사에 따르면 파락호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한때 수암종택에 머물면서 영남지역 인물들을 파악하며 후일을 도모했다고 한다. 종가에서 전해오는 죽병이 당시 흥선대원군이 그려준 것이라고 한다.

흥선대원군 집권 후 남인계 중용책에 따라 류후조는 1864년 이조참판, 1866년 우의정, 1867년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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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주 수암종택 불천위 제사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2.08.22. 

'상주 수암종택'은 불천위 제사 외에도 기제, 묘제 등 제례문화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녹패, 간찰, 문집 등 고문헌과 등롱, 가마, 관복 등 민속유물이 다수 남아 있어 19세기 이전 상주지역 상류주택에서의 생활문화를 잘 보여 준다.

특히, 류진이 남긴 '임진록', '임자록'과 흥선대원군과 류후조가 주고받은 '운현간첩' 등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조선 정치·사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현재 이들 자료는 상주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 경북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 기증·기탁돼 보존되고 있다.

'상주 수암종택'에는 벼슬길에 올랐음에도 절조를 지켜 청렴했던 류후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 온다. 녹봉이 떨어졌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인 백비탕을 놋그릇에 담아 대접해 손님에 대한 예를 다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상은 후손에게 이어졌다. 류진의 11대손 류우국(1895~1928)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1923년 조선의열단에서 김지섭과 함께 활동했다. 북경에서 '혁명도보', '혈조' 등 신문과 잡지를 발행했다.

이후 1926년 독립운동 자금 조달 차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던 중 1928년 급병으로 요절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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